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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데도 규칙이 있었습니다. 백만 엔, 딱 그만큼만 모이면 떠납니다. 영화 '백만 엔 걸 스즈코'의 주인공이 스스로 만든 유일한 법칙이었습니다. 처음 이 설정을 봤을 때 저는 "뭔가 낭만적인 유랑기 아닐까" 싶었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엔 그게 낭만이 아니라 깊은 수치심에서 비롯된 도피 패턴이라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패턴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백만엔걸스즈코 영화포스터

 

 

 

전과보다 무서웠던 것, 스즈코를 떠나게 만든 '수치심'

<백만엔걸 스즈코>에서 스즈코가 계속 떠나는 이유를 처음에는 단순히 전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면 그녀가 도망치는 대상은 특정한 장소나 사람이 아니라 결국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더 가깝습니다. 동거남이 버린 고양이를 대신해 그의 물건을 내다버린 일이 전과로 이어졌고, 스즈코는 그 사건 이후 누구에게도 제대로 자신의 억울함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자신 자체를 잘못된 사람처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에게 돌아간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가족처럼 보이지만 집 안에서는 끊임없이 갈등이 이어지고, 스즈코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꺼내지 못합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이름도 과거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전과자라는 꼬리표 없이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스즈코의 여행은 자유로운 여행이라기보다 철저한 도피에 가깝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만,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다시 떠납니다. 누군가와 가까워질 가능성이 생기면 또 거리를 둡니다. 상처받기 전에 먼저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이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습니다. 힘든 상황을 해결하기보다 그 상황 자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결국 스즈코가 떠나는 이유는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회피', 백만 엔을 모으면 떠난다, 스즈코가 원했던 진짜 자유

스즈코에게백만 엔은 단순한 여행 경비가 아닙니다. 그녀는 새로운 곳에 도착할 때마다 일을 구하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은 채 돈을 모읍니다. 그리고 정확히 백만 엔이 모이면 다시 그곳을 떠납니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게 보입니다. 어렵게 정착했는데 왜 또 떠나는 걸까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 반복을 보고 있으면 백만 엔이라는 숫자에 그녀만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스즈코는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백만 엔은 부자가 되기 위한 돈이 아니라나는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증명에 가깝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일하고, 돈을 모으고,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시작하는 과정 자체가 스즈코에게는 일종의 자립 훈련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스즈코의 방식이 완전히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돈을 모으면 떠나고, 관계가 깊어질 것 같으면 다시 도망칩니다. 그녀는 독립과 고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갑니다. 혼자 살아가는 능력은 분명 생겼지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저는백만 엔이라는 제목이 오히려 스즈코의 외로움을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어디에도 머물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스즈코가 찾아야 했던 것은 백만 엔이 아니라 떠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망치던 스즈코에게 '용기'를 가르쳐준 동생 타쿠야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인물은 의외로 스즈코의 동생 타쿠야였습니다. 학교폭력을 당하던 타쿠야는 처음에는 누나처럼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도망치는 대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맞서기로 결심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용기의 출발점 중 하나가 스즈코였다는 사실입니다.

 

스즈코는 자신이 겁이 많다고 생각하며 계속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타쿠야가 바라본 누나는 전혀 달랐습니다. 자신을 조롱하는 옛 동창들 앞에서 당당하게 저항하는 모습은 오히려 동생에게 용기를 줍니다. 정작 스즈코 본인은 자신을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미 충분히 강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이 따뜻하면서도 묘하게 아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는 자신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생각보다 큰 영향을 주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스즈코 역시 자신이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과정에서 일하고 돈을 벌고 혼자 살아가며 조금씩 자신을 지탱하는 힘을 만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스즈코가 다시 떠나는 장면은 처음의 도피와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같은떠남이지만 이번에는 무작정 숨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동생의 변화를 지켜보고,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나카지마와의 관계에서도 한 걸음 물러서면서 스즈코는 조금씩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합니다.

 

도망치는 것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은 겉으로는 똑같아 보여도 완전히 다릅니다. 《백만엔걸 스즈코》의 마지막이 오래 남는 이유도 바로 그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백만 엔 걸 스즈코, 꼭 봐야 할 영화인가요?

A. 스토리 자체에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영상미나 서사의 완성도보다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밀도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관계에서 자꾸 도망치는 자신을 발견한 적 있는 분이라면 꽤 묵직하게 남을 작품입니다. 아오이 유우의 리즈 시절 연기라는 점만으로도 볼 이유가 충분합니다.

 

 

Q. 나카지마와 스즈코가 결국 못 만나는 결말, 어떻게 봐야 하나요?

A. 아쉽다는 감정이 먼저 드는 게 솔직한 반응이었습니다. 다만 살다 보면 오해 때문에 풀지 못하고 지나가버린 인연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 그 엇갈림 자체가 삶의 실제 질감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그것을 해피엔딩으로 봉합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결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한동안 생각한 건 "지금 내가 도망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였습니다. 목표가 있는데 계속 미루고, 뭐가 어려워서 못 하는지 모르겠는데 사실은 그냥 두렵고 하기 싫은 것, 그게 회피입니다. 그 상황이 '안전한 길'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가장 힘든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스즈코가 남긴 메시지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한심하게 느껴져도, 돈이 없고 쓸모없다는 감각이 들어도, 그 순간을 버텨낸 사람은 이미 최고로 열심히 산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