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미 수도 없이 반복되어 식상해진 장치들이 이렇게 한 영화 안에 다 모여 있어도 되나 싶을 만큼 전형적인 구성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의 눈이 촉촉해져 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대만 영화 <나의 소녀시대> 이야기입니다.

나의소녀시대 영화포스터



클리셰 범벅인데 왜 이렇게 재밌을까

행운의 편지, 교복, 킹카, 선도부, 일진 패싸움, 롤러장 땡땡이. 영화를 보다 보면 90년대 하이틴 장르의 단골 소재들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보통 이 정도면 "허허, 과하네~" 하고 거리감이 생기는데 이상하게 <나의 소녀시대>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볼 때마다 같은 장면에서 웃고 같은 장면에서 먹먹해지는 신기한 영화입니다. 

그 이유는 결국엔 캐릭터의 진정성 때문임을 느끼게 됩니다. 여주인공 린전신은 유덕화 팬을 자처하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이고, 남주인공 쉬타이위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자 선도부 완장까지 찬 양아치입니다. 여기서 선도부란 학생들의 생활을 단속하는 역할을 맡은 학생 자치 조직인데, 싸움꾼이 선도부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그 시절 학교 문화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된 건 대만 청춘 영화를 찾아보다가였는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와 함께 개인적으로 투톱으로 꼽을 만큼 애정하는 작품이 됐습니다. 특히 왕대륙이라는 배우를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됐는데, 시원시원한 인상으로 개구쟁이 같아 보이다가도 눈빛 하나로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장면들에서 배우로서의 멋짐 폭발이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영화의 서사 구조를 보면 하이틴 로맨스, 즉 10대 청소년의 사랑과 성장을 중심에 놓는 장르적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이틴 로맨스란 첫사랑, 우정, 성장의 통과의례를 주로 고등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그려내는 서브 장르를 의미합니다. 이 영화는 손을 잡는 스킨십이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대사와 연출만으로 첫사랑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해 냅니다. 오히려 그 절제 덕분에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 행운의 편지를 매개로 얽히는 린전신과 쉬타이위의 만남 — 우연처럼 보이지만 필연으로 이어지는 구조
  • 롤러스케이트 데이트 시퀀스 — 마음을 확인하는 결정적 장면으로, 클리셰이지만 연출이 살려낸 명장면
  • 유덕화 콘서트 엔딩 —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가 "린전신 사랑합니다"로 연결되는 언어유희적 해피엔딩

오글거리는 장면들이 분명히 있는데, 그 오글거림이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게 느껴지는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요약: 클리셰가 넘쳐도 캐릭터의 진정성과 절제된 연출 덕분에 매번 봐도 새롭게 감동받는 작품입니다.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판도라 상자

영화의 액자 서사 구조가 이 작품을 단순한 하이틴물과 구분 짓는 핵심입니다. 액자 서사란 현재의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서술 구조를 말하는데, <나의 소녀시대>는 갑질 상사 뒤치다꺼리에 지친 직장인 린전신이 18살의 기억으로 순간 이동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열립니다. "학창 시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영화"라는 말이 정확히 맞는 이유가 바로 이 구조에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도 꽤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대학 시절에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수업도 빼먹고 거의 매일 만났으면서도 끝내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저도 그 상황을 알면서 마지막 용기를 내지 못한 채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쉬타이위가 녹음 테이프에 마음을 담아두고 떠나버리는 장면을 봤을 때 괜히 가슴이 아렸던 게 그냥 영화 속 인물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좋아하는 사람을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해피엔딩이 아니었어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감사한 일입니다. 영화 속 린전신이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꺼내며 "내 인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빛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깨닫는 것처럼, 제 경우에도 그 서투른 짝사랑의 기억이 부끄럽기보다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합니다. 처음엔 "뭐가 재밌다고" 싶다가 어느 순간 눈물이 나는 그 경험, 이게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이 풀려나오는 카타르시스였던 겁니다.

배우의 측면에서도 왕대륙 배우는 소년미와 남성미를 동시에 표현해야 하는 쉽지 않은 역할을 맡았는데, 실제로 보면 눈빛 하나로 그 경계를 오가는 장면들이 꽤 설득력 있습니다. 반대로 린전신 역의 송하운 배우는 과하게 예쁘지 않은, 평범하지만 매력 있는 여고생을 찰떡같이 표현해냈습니다. 이 캐스팅 자체가 영화의 공감대를 넓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요약: 액자 서사 구조와 카타르시스 효과 덕분에 이 영화는 단순한 청춘물이 아니라 개인의 첫사랑 기억을 소환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왕대륙이 나오는 다른 대만 영화도 있나요?

A. 네, 있습니다. <나의 소녀시대>로 주목받은 이후 여러 작품에 출연했는데, 저는 이 영화 이후 왕대륙의 필모그래피를 따로 찾아볼 만큼 관심이 생겼습니다. 대만 청춘 영화 전반에 관심이 생기는 계기가 되는 배우이기도 합니다. <장난스런 키스>도 추천드립니다.

 

Q.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랑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A. 제 경우엔 둘 다 투톱이라 선택이 어렵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좀 더 씁쓸한 현실 감각을 담고 있고, <나의 소녀시대>는 판타지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분 좋게 끝나고 싶을 때는 <나의 소녀시대>를 먼저 권합니다.

 

Q. 유덕화가 직접 나오나요?

A. 네, 마지막에 깜짝 등장합니다. 영화임을 알면서도 그 장면에서 순간적으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 얼마나 깊이 빠져들었는지를 그 장면 하나로 확인했습니다. 오랜 팬들에게는 선물 같은 모먼트입니다.

 

결론

볼 때마다 대만에 가고 싶어지는 영화라는 말이 과장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대만 감성과 90년대 하이틴 정서를 동시에 담아내면서도 한국 관객에게 낯설지 않은 공감대를 만들어냅니다. 짝사랑, 서툰 고백, 이불킥 하게 만드는 그 오글거리는 순간들이 결국 누구에게나 있었을 찬란한 미성숙의 흔적이라는 걸 이 영화는 아주 예쁘게 증명해 냅니다.

이런 류의 영화는 "재밌냐"라고 묻는 것보다 그냥 틀어놓고 보는 게 맞습니다. 처음엔 식상하다 싶다가 어느 순간 자기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그 경험이 이 영화의 진짜 힘입니다. 대만 청춘 영화가 처음이라면 <나의 소녀시대>부터 시작하는 것을 권합니다. 왕대륙, 송운화라는 배우도 함께 발견하게 될 거고, 그 시절의 자신도 함께 만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