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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나서 오히려 시간이 짧았다고 느껴지는 영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입니다.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 오직 말과 침묵만으로 이 정도의 밀도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보고 나서도 한동안 믿기지 않았습니다.

드라이브마이카 영화포스터

 


상처를 품은 두 사람, 가후쿠와 미사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 가후쿠는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입니다. 겉으로는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내면에는 아내 오토와 관련된 깊은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가후쿠는 결국 오토의 죽음을 맞이하고, 그때부터 자신의 감정과 상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이어가지만, 마음속에는 끝내 풀지 못한 질문과 죄책감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히로시마에서 연극을 연출하게 된 그는 제작진이 배정한 운전기사 미사키와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무뚝뚝한 운전기사와 예민한 연출가 정도로 보였던 두 사람이지만, 매일 빨간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의 상처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가후쿠는 차 안에서 오토의 목소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연극 대사를 연습하고, 미사키는 말없이 그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줍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지만, 침묵 속에서 오히려 서로의 아픔을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오토와 관련된 젊은 배우 다카츠키가 등장하면서 가후쿠는 자신이 외면해 왔던 과거와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오토의 죽음 이후 묻어두었던 감정이 다카츠키와의 만남을 통해 다시 떠오르면서, 가후쿠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아내의 진짜 모습을 되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 영화는 특별한 사건이 연속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처를 품은 두 사람이 자동차라는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삶을 바라보며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관계의 단절, 그리고 균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생각했던 것은 '말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가후쿠와 오토는 겉으로 보면 다정한 부부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잃은 뒤 두 사람 사이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한 상처가 남아 있었습니다. 가후쿠는 오토의 불륜을 알게 된 순간에도 따져 묻지 않고 조용히 집을 나옵니다. 어쩌면 그때 한마디만 했더라면 관계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침묵을 선택했고, 그 침묵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큰 벽이 됩니다.

 

영화에서 단절은 크게 싸우거나 등을 돌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반대편 사례도 함께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유산이라는 비슷한 상실을 경험한 유나와 윤수 부부는 언어와 신체적인 장벽이 있음에도 서로에게 마음을 닫지 않습니다. 말이 완벽하게 통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고통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결국 영화는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려는 태도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가후쿠가 미사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미사키 역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가후쿠와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빨간 자동차, 핸들을 넘긴 순간 시작된 소통과 치유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공간은 단연 가후쿠의 빨간 자동차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이동 수단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자동차는 가후쿠가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바뀝니다. 차 안에서는 오토의 목소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가 반복해서 흘러나옵니다. 가후쿠는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연극 대사를 연습하고, 마치 과거의 시간 속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차를 운전하던 미사키에게 핸들을 맡깁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이라고 느꼈습니다. 가후쿠가 핸들을 넘긴다는 것은 단순히 운전을 맡기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이 붙잡고 있던 과거와 삶의 방향을 조금씩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사키 역시 가후쿠와 마찬가지로 깊은 죄책감과 상실을 품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해결해 주거나 억지로 위로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야기를 듣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함께 차를 달립니다. 그 과정에서 가후쿠는 자신이 오토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수어를 사용하는 배우 유나의 연기를 통해 그는 언어가 진실에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도 경험합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 치유는 상처가 깨끗하게 사라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과거를 없애는 것도, 죽은 사람을 잊는 것도 아닙니다. 그 상처를 품은 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제 괜찮아졌다'는 감정보다 '상처가 있어도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멈춰 있던 가후쿠의 삶에서 빨간 자동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한 것처럼, 사람 역시 과거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제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된 메시지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드라이브 마이 카 상영 시간이 너무 길지 않나요?

A. 약 179분, 세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입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중반부까지는 체감 속도가 느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느린 호흡 자체가 연출의 일부입니다. 억지로 버티는 게 아니라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빠져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Q. 마지막 장면에 미사키가 한국에 있는 이유가 뭔가요?

A. 이 부분이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이 의도적입니다. 팬데믹 시대 한국에 사는 어느 창작자의 상상 속 이야기 전체가 미사키를 통해 창조되었다는 독해도 가능하고, 미사키가 일본을 떠나 한국에 정착했다는 사실적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그건 감상자의 몫이고, 그것 자체가 이 영화의 설계입니다.

 

Q. 오토의 대본 속 이야기가 실제 가후쿠 부부 이야기랑 어떻게 연결되나요?

A. 오토의 대본에서 소녀가 짝사랑하는 소년의 집에 몰래 침입한다는 설정은, 오토가 가후쿠의 외도 목격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상황을 대본으로 치환한 것으로 읽힙니다. 가후쿠는 소년이면서 동시에 침입자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내면이 단 하나의 해석으로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을 이 대본 구조가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결론

인스턴트처럼 소비되고 금세 잊히는 영화들 사이에서, 이 작품은 보고 나서 오히려 더 커지는 영화였습니다.
상실을 외면하지 않고, 소통을 시도하고, 그럼에도 살아내야 한다는 것. 이 영화는 그것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줄 뿐입니다.